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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의/Photoshop 포토샵배우기

사진이야기 빛과 그림자, 데포르마숑, 우연성

by 비엉 2016. 12. 3.

빛과 그림자의 존재감


사진은 갖가지 장면을 보고, 온갖 것을 목격하며, 모든 것을 고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진의 기록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요, 이로 말미암아 사진은 다른 시각 매체와 엄연히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어떠한 폭군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용감한 양심이 뒷받침되어 놀라운 위력을 떨치기 때문에, 때로는 너무나 여기에 치우치는 감이 있다. 즉 사진의 기록성이 낳는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것만이 사진 표현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이들은 사진의 기록성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있으면 다 된 줄 알고 그 밑에서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은 반드시 사진의 기록성만이 사진 본래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외계의 상을 재현하는 특성이 사진표현의 기조인 것은 말할 나위 없으나, 빛과 감광제에도 사진의 훌륭한 독자적 표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현 시대에는 디지털 센서에 따라 다른 표현이 가능하기도하다) 즉 각양각색의 빛을 감광막에 정착시키는 능력도 사진이 회화와 구별되는 커다란 미학상의 특징이다. 더구나 이것이 모두 흑과 백으로 추상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사진이 처음부터 색채를 띠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 때문에 이 위대한 특질을 저버리고 사진은 완전히 회화에 굴복하여 아무런 반성없이 추종만 했을지도 모른다. 

 아뭏든 빛의 생생한 존재감을 감광막에 정착해 나아가는 데에 사진의 훌륭한 표현성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상에 끊임없이 비치는 빛의 양을 조절하고 또는 선택하여 이것에 깃들은 빛과 그림자의 뉘앙스를 포착하는 데에 영상 표현으로서의 사진의 커다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일찌기 독일의 바우하우스의 후신이라고 하는 시카고의 인스티튜트 어브 디자인의 사진과가 '라이트 워크샵'이라고 부르는 과목을 두어 이것을 다루었다. 이 워크샵의 교수였던 모홀리나기가 사진에 있어서의 빛의 역할을 중시하여 표현상의 실험에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사진은 기록성에 의해 새로운 '시간'을 체험하는 한편으로 빛과 그림자의 감광막에의 정착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포토그램의 표현을 생각해 보아도 사진에 있어서 깊은 그림자를 동반하는 빛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빛과 그림자에 의한 명암의 강약과, 백에서 흑에로의 급작스런 변화에서 오는 놀라운 공간의 깊이, 그리고 흑백의 밀도가 풍부한 상징적이나 샤프한 추상성 등은 다채로운 공간 표현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컬러 사진에 있어서의 색채 표현을 예로 들어도 사진이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묘사하는 능력의 특징이 잘 이해된다. 즉 컬러사진의 경우, 색채 그 자체를 정확하게 재현하려면 특정한 조건일 때만 가능하다. 대상물 전체에 골고루 광선이 퍼지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빛이 골고루 닿아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조건일 때만 색채라는 것은 충실하게 재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 효과란 사진의 경우 결코 아름다운 표현이 되지 못한다. 오힐 ㅕ빛의 강약이 뒤섞이며 빛과 그림자가 하나의 화면을 엮어 짤 때, 어떤 경우는 리얼리티의 의미가 강조되고, 또 어떤 때에는 공간의 신비를 심화 시켜 매력이 넘치는 표현이 된다. 즉 본디 빛이라고 하는 것은 그림자를 동반함으로써 비로소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광선의 기구와 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한 오늘날에는 이것들을 조작함으로써 대상을 비추는 빛의 양을 극히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때는 화려한 하이라이트를 바탕으로 대상에 그림자를 깔고, 어떤 때는 그림자를 주조로 한 효과에 의해 풍부한 무드를 화면에 살리며, 또 어떤 경우에는 빛과 그림자가 어울려 빚어내는 율동적인 선의 아름다움이나 빛의 강약에 의한 추상적인 패턴 같은 변화 무쌍한 공간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빛은 점점 그의 마술적인 표현 영역을 넓혀, 사진의 놀라운 무기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한편 자연광선도, 대상물을 비추는 현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 표현성이 있는지 모른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대상을 비추는 태양광선의 미묘한 명암은 때대로 표현에 풍부한 창의성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모델을 옥외에서 연출하여 대단히 다이나믹한 패션사진을 찍어서 유명해진 마틴 뭉카치가 '사진을 찍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나, 태양이 없이는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을 만큼 태양이 빚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는 사진가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고 있ㄴ느 것이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빛에 대하여 남다르게 깊은 연구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그의 회화에서는 그림자가 강렬한 힘을 보이며, 밝은 부분은 무한한 계시를 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자에서 빛은 물리적인 빛을 뛰어넘어서 정신적인 고백을 속삭이는 빛으로 승화되었다. 즉 렘브란트의 경우, 빛과 그림자의 박력있는 터치가 극적인 효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효용성을 사진에서는 애초부터 이용해왔기에 빛으로 부엇을 묘사한다는 것은 이제와서는 사진 본연의 특기가 되었다. 따라서 사진이 내세우는 이 특징은 사진적인 표현수단 중에서 매우 흥미있는 수단의 하나이다. 


데포르마숑(deformation)의 표정


데포르마숑이라는 기법이 있따. 물론 이것은 회화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프랑스말로 포름(form)이란 글자가 바탕이 된 말이다. 형성하는 것을 포르마숑(formation)이라 하고, 이 말에 de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변형 왜곡이란 뜻이 된다.

 이처럼 형이란 글자가 이 용어의 골자를 이루고 있는지라, 데포르마숑의 의미도 자연 상태의 모양이 전제로 되어있다. 요컨대 자연의 형을 기본꼴로 삼고 이것을 변형시키거나 왜곡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연 그대로의 포름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순추상적인 표현에는 데포르마숑이 있을 수 없다. 즉 이 경우의 형의 구성은 데포르마숑과 떼어서 생각해야한다. 이러한 기법은 근대 예술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무릇 자연의 형이 기본꼴인 이상은 표현상 데포르마숑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화가 미로가 그린 비너스의 얼굴에 나타난 유력한 선이나 풍만한 육체의 선은 반드시 자연 그대로의 프로포션(Proportion)이 아니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의 데포르마숑이 가해졌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단순한 자연의 모사가 아닌한, 예술표현은 모든 경우에 데포르마숑이 따른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이것이 근대예술의 특징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까닭이 있다. 즉 인간해방을 부르짖는 근대 문화의 성격이 개성의 자유와 자아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예술 쪽에도 이것이 반영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내면적 욕구가 자연의 형태를 변형시키게 되었고, 결국 이로써 자기를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예술에 있어서의 데포르마숑은 주관의 강조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명히 사진에 있어서도 데포르마숑은 바로 그러한 경향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전후의 민주화 풍조를 타고 데포르마숑을 시도하는 기운이 높아졌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해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성의 자유와 자아의 주장을 중요시하고, 내면적인 각ㅁ정이나 이미지를 강력하게 표출하려는 의도가 표현상 집약적인 강조를 하기 위해 대상물의 변형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기성 작가 보다도 신진들 사이에 이러한 경향이 짙었고, 이제는 이미 상식적인 수단이 되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진의 창조성을 테마로 1951년 자르브뤼켄에서 열린 오토 슈타이너트 주재의 '국제사진 전람회'가 '주관적 사진'이라는 이름의 사진집으로 출판되어, 세계적으로 데포르마숑의 기법이 성행되었다. 사진가의 주체성의 확립과 형식에의 감정도입을 주장하는 슈타이너트의 미학은 주관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형태나 인간의 모습을 변형시켜, 이 형식 속에 자기의 창조적 세계를 확립하려는 주장을 한 것인데, 그 진의가 얼마만큼 이해됐는가는 별도로 치더라도 그 당시 끼친 바 영향은 매우 컸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사진표현에서는 충실한 자연의 재현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을 변형시키는 표현방법에 새로운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면 사진의 데포르마숑은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가? 맨 먼저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렌즈가 지니고 있는 기능의 이용이다. 예를 들어 광각렌즈의 특성을 빌리면 퍼스펙티브의 균형이 깨지고, 완전히 사실과 다른 변형이 생긴다. 이러한 현상은 초망원 렌즈를 쓰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에컨대 촛점거리 500mm 이상의 망원 렌즈는 육안의 가시범위를 넘어선 시계를 포착하여, 초망원 렌즈만이 갖고있는 과장된 퍼스펙티브에 의한 대상의 현저한 변형을 보여준다. 더우기 어안렌즈는 더욱 과장적인 기묘한 시각의 변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렌즈를 다양하게 구사함으로써 대상물을 데포름하여, 그 속에 작가의 내면의 이미지를 결실케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지금 말한 렌즈에 의한 변형은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 아니라는 이유로해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뉴스 사진인 경우는 사실을 정확하게 소개하고 설명하는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제의 퍼스펙티브와 다른 표현을 하면 독자가 어리둥절해지므로 결코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표현에서는, 예를 들어 다큐먼트 같은 것은 사진가의 주체성과 적극적인 현실 비판을 중시하는 것이어서 데포르마숑은 필요한 기법이며, 따라서 렌즈의 퍼스펙티브의 변형으로 한층 더 대상의 리얼리티에 육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코 이것은 현실을 소홀히 다루는 것도 아니며 단순한 기법의 장난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감동이나 사상에 알맞는 표현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렌즈뿐만 아니라 암실 작업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데포르마숑의 기법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화작업을 할 때 으례히 인화지는 이젤마스크에 끼워서 네가와 평행되게 놓고 정확하게 상이 맺히게 한다. 그러나 이젤의 어느 한쪽을 들어서 비스듬히 경사지게 하면 화상은 기울어져 일종의 데포르마숑이 생긴다. 그런데 이 방법을 더 여러가지로 구사하여 부분 노광을 계속하면서 인화지를 이동시키면, 시간적인 움직임의 표현을 과장한 변형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데포르마숑의 기법은 풍자적인 효과를 내기에 알맞다. 

 이상은 한 두가지 예에 지나지 않으나, 특히 렌즈를 구분해서 쓰거나 암실 작업 중에 초라영한 대상을 데포름하여 사진가는 개성적인 시각의 표현을 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할 때 현실을 직접 다루는 사진의 경우는 현상이라는 사실에 너무 사로잡혀 이것을 변형시키는 것은 사실을 다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러한 견해는 너무도 소박한 해석이다. 오히려 데포르마숑을 알맞게 구사하면 대상의 내면에 감춰진 리얼리티를 캐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연성의 도입


렌즈는 운동하는 대상의 속도를 포착할 뿐만 아니라 대상이 놓여있는 각종의 상황을 기록하는 데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눈이 도저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읜 눈은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렌즈보다 느린 육안의 활동은 아주 완전하게 사물을 보지 못한다. 사실상 눈은 시계에 들어온 것도 확실히 우리의 의식에 전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많은 것들이 마치 눈에 안뜨인 것처럼 우리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거리에서 스냅을 했을 때 완성된 사진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잘 알 수 있다. 특히 어떤 상황 속에서 사진이 겨냥하는 것이 움직이는 대상인 경우에는 더욱 인간의 시각이 불확실하며, 반대로 렌즈가 정확하게 외계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때 우리의 눈은 움직이는 대상에만 아주 신경을 곤두세워 이것을 화면에 아주 잘 담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상황을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없다. 대충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를 짐작해서 이것을 처리할 정도이지, 아무래도 구석구석까지 눈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아니 세세한 부분까지는 고사하고 대충 눈에 들어와 있음직한 상황조차 긱억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곳에 이런 간판이 있었던가, 여기에 어린애가 또 하나 있었군, 혹은 배경에 이런 나무가 있었든가 하고 놀래는 수가 많다. 어쨌든 노리는 목적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많은 것들이 뜻밖에 찍히는 수가 많다. 이러기 때문에 오히려 주제의 효과가 더 살아나고, 표현은 박력이 넘치게 되고, 내용의 리얼리티가 강조되는 것도 면밀히 관찰해 보면 짐작될 것이다. 즉 이와 같이 렌즈는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샅샅이 기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렌즈느 ㄴ인간의 눈을 보완해주며, 우리들에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드높혀 준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서 대상 및 상황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렌즈의 객관적인 능력, 즉 물리적 화학적인 방법에 의한 지각은 표현상으로 우연성의 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믕로써 액튜얼리티에 육박하며, 존재의 확실성을 포착하고, 나아가서는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까지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낡은 예술의식에 사로잡혔던 과거에는, 렌즈의 정교한 지각성이 포착하는 우연성은 사진이 예술로 승격하기 위해서는 배격하지 않으면 안될 금기로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에만 충실하여 육안에 보이는대로만 화면의 질서를 추구하려 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렌즈의 예리한 성능을 배제하려 하였다. 즉 렌즈의 예리한 묘사성을 둔화시키려고 때로는 렌즈에 침을 발라 우연성이 표현 속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표현을 하는 경우 회화의 구도법을 쫓아 이에 따라 대상을 처리하여 한 것도 이와 연관된 생각에서였다. 요컨대 모든 것을 미리 계산해서 대상을 회화적인 구도의 틀에 맞추어, 의식권 밖에 있는 나머지 것들은 모조리 거부하려 하였ㅅ다. 이렇게 하여 렌즈의 자동적인 기록성을 억제하고, 육안으로 본 것만을 다시 말해서 주관적인 인식의 대상만을 예술적으로 구성했으며, 이것이 사진의 미학이라고 해석했다. 

 이와 같이 회화의 구도를 앞장세워 놓고 거기에 표현을 꿰맞추려고 했기 때문에 과거의 살롱사진은 아무리 생생한 현실을 대상으로 했어도 표현상 절실한 사실감이 없다. 의식적으로 계산된 현실은 생기가 없는 미적지근한 표현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진에서는 렌즈가 한 인간의 좁은 지헤의 울타리를 벗어나 미처 인식하지 못한 범위까지 정확하게 포착하므로 표현상의 박진감 있는 리얼리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연성의 침투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사진 표현의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는 미처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따. 사진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어디까지나 배격해야할 잡 것으로 보았으며, 또한 이 때문에 사진의 품격이 떨어진다고 오판하여 실망조차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 사진의 경우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성의 개입은 결코 단점이 아니라 사진만의 장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주체성이 투철하면 이러하면 우연성의 개입을 기꺼이 환영할 것이며, 이로써 주제를 강하게 자극하여 설명성을 보다 강화시키는 동시에 현실의 의미를 똑똑히 확인하려 할 것이다. 우연성이란 인간의 의식권 밖에 있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 개입함으로써 화면의 미적질서를 깨고, 오히려 주제에 힘을 주어, 육안의 차원으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액츄얼한 의미를 발견케한다. 

 그러면 이 우연성은 어떤 방법으로 도입되는가를 알아보면, 사진의 모든 수단이 이미 우연성을 동반한 표현능력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 하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에는 이것을 결점으로 여기고 회화의 구도법에만 매달려 이를 어디까지나 배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진의 독자적인 구도를 추구하다 보니 표현 속에 저절로 우연성이 끼어들게 되었다. 즉 화회의 구도처럼 캔버스의 테두리 안에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안팎에서 시공성이 긴밀한 연관을 맺도록 구도를 절단하다 보니까,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프레이밍 기법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더이상 길게 설명하진 않겠지만, 요컨대 회화의 구도를 적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대로 다시 말해서 육안에 비친 대로 대상을 구도 속에 틀어박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연성이 끼어들 여지가 털끝만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구도 즉 순간을 중시하는 프레이밍은 당연히 인간의 의식권 밖의 상황까지 화면에 끼어들게 한다. 이제 여기에 한 가지 나쁜 예를 들어서 역설적으로 구도와 우연성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다. 가령 어떤 살롱 사진가가 거리에서 스냅한 사진이 있다 하자. 이 작품은 분명히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갖가지 활동을 하는 여러 사람을 화면에 담고 있어서 얼핏 보아 흥미있게 보이는데도, 조금ㄷ치도 현실을 실감시키지 못한다. 그 까닭은 이 살롱 사진가가 눈앞에 가만히 서 있는 인물과 주위의 상황과를 연관시켜 미리 구도를 짜 놓고 그 속에 알맞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기다려 셔터를 끊었기 때문이다. 즉 미리 설정한 구도라는 의식의 틀에 들어맞는 것만을 찍었기 때문에, 아무리 거리를 스냅하여 마치 우연한 상황이 끼어든 것처럼 했어도, 이것은 진짜의 우연성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므로 주제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고 만다. 이 한가지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만드는 구도가 아니라 선택하는 구도를ㄹ 적극 받아들여야만, 우연성이 주제를 자극하는 상황 묘사가 효과적으로 달성된다. 그런 뜻에서 노 파인더의 촬영 방법같은 것은 가장 적극적인 방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육안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 렌즈의 시각 능력에서도 물론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광각 렌즈의 지각 능력은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까지 넓게 손을 뻗쳐 우연의 미학에 많은 보탬을 주고있따. 예를 들어 광각렌즈는 문자 그대로 넓은 28mm, 28mm보다 19mm로 촛점거리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광각적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35mm광각은 약 60도, 19mm는 96도의 사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상에 바짝 접근하여 촬영하면 표준렌즈로서는 엄두도 못낼 넓은 범위를 커버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넓은 사각은 우연성을 끌어들이는 데 아주 유리하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눈을 돌려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시야를 광각렌즈의 사각은 단번에 커버하기 때문에, 인간이 보고도 지각 못한 부분이나 인간의 의식권에 들어오지 않은 객관 존재까지 쉽사리 지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예기치 않는 '상황'의 개입이며, 이것이 작가가 설정한 상황의 식과 맞부딪힐 때 발생하는 충격으로 창조적 표현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광각 렌즈의 넓은 사각은 여러가지 요소들을 잡다하게 끌어들여 주제를 자극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슬로우 셔터에 의한 흔들림의 효과도 우연성을 끌어들이는 수단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한 운동을 슬로우 셔터로 흔들리게 표현하는 경우, 흔들림의 정도를 미리 정확하게 계산하기란 솔직히 불가능하다. 다만 경험을 통해서 대충 어림짐작을 할 뿐이다. 따라서 때로는 미리 점친 계산 밖으로 빗나간 흔들림의 효과, 즉 작가가 예상치 않은 엉뚱한 블러효과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슬로우 셔터에 의한 우연성의 개입인데, 이러한 예상밖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흔들림에 의한 미학적 효과는 무한히 넓어지며 인간의 인식권 안에서는 창조되지 않는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사진의 표현은 메카니즘을 매개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우연성의 도입 또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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