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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사진이야기

사진이야기 제작형식의 역할 톤의 베리에이션

by 비엉 2016. 12. 1.

제작형식의 역할


단사진이라든가 조사진 또는 시리즈 사진이라는 말이 잘 쓰인다. 이 말은 표현에 있어서 제작 형식의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진의 경우 생각밖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작 형식이 표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제약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테크닉이나 또는 내용과 관련시켰을 때 제작형식은 결과를 크게 좌우한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 1920년대까지는 모든 사진이 단사진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씨리즈라든가 조사진이라는 형식이 채용되어 그것이 오늘날 발전해온 것이다. 사진이 회화의 꽁무니를 쫓던 시대에는 대부분 단사진의 형식을 취했었는데, 아무래도 회화주의적인 따블로의식에 사로잡힐 염려가 있었다. 왜냐하면 사진은 어떤 현상의 단편을 순간적으로 프레이밍하는 작업을 통한 표현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장이라는 대단히 한정된 화면공간 속에 테마의 내용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전하여,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기가 대단히 어렵다. 막상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 가능성은 대단히 적다. 만약 한 장이라는 제작 조건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면, 다분히 기술적으로 표현을 다듬는 솜씨의 탁월함에 치우치기 쉽다. 즉 내용보다도 테크닉의 우열을 보다 더 중요시하여 한 장의 걸작을 만드는 데 빠질 염려가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단사진의 성격이다. 또한 한 장이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서 무의식 중에 회화적인 작화 방법을 끌어들이기 쉬우며, 표현을 회화처럼 하려는 과오를 범하기도 쉽다. 이처럼 당시의 사진은 그와 같은 단사진의 숙명을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많든 적든 회화주의적인 따블로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하여 한 장의 걸작을 만들려고 애쓴 나머지 대상을 기술적인 솜씨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생겼는데, 이것이 옛 사진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즉 살롱 픽쳐라고 불리는 양식은 이러한 단사진이 갖고 있는 표현 형식의 약점을 가장 단적으로 말해주는 본보기이다.

 그러나 단사진이라는 형식은 사진에 대한 사고방식이 ㄱ느대적으로 뒤바뀐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한 결점을 씻지 못하고 있다. 근대 사진의 미학을 자각하여, 살롱 사진가와 같은 자연관조가 아니라 보도적인 태도로 현실을 직시하는 사진가 중에도, 이 형식을 즐겨쓰기 때문에 표현이 대단한 제약을 받아 작품이 종종 따블로 주의나 걸작주의의 방향으로 치우치는 사례가 많다. 소위 1매 사진이라는 표현형식에는 맨먼저 잠깐 지적한대로 사진의 특성으로 미루어보아 마땅히 그렇게 될 수 밖에없는 숙명적인 성격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단사진의 형식에 매달려 이에 이미지를 전개하려 할 때, 앞서 말한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결과가 나와 테마에 대한 적극성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을 잃고 말며, 또는 강렬한 자기 주장을 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강력한 테마의식이 없는 사진가는 단사진의 형식에 하등 불편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예술의식을 만족시켜주는데 알맞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라면 오늘날 사진계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의 작품 또한 너무나 유명하다. 특히 신선한 캔디드 수법이나 독특한 컴포지션의 설정 등은 사진의 특징을 십분 구사하여 얻었기에 다른 사진가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란 매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에서는 뭣인가 이가 한 ㅏ빠진 듯한 소극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단사진의 형식에 사로잡혀 풍속적인 리얼리즘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걸작주의에 빠져 내용을 날카롭게 표현하는데 아쉬움을 남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정적인 순간'은 물론이고 '유럽인'이나 '모스크바'와 같은 사진집만 해도, 그것은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이나 윌리엄클라인의 '뉴욕'과 같이 하나의 굵직한 테마로 일관한 시리즈가 아니고 잘 된 풍속사진만을 골라 집대성한 소위 걸작 작품집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한 장 한 장의 사진에서 우러나오는 맛을 감상하는 흥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현상에 대한 비판의 눈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유럽인'이라는 사진집은 나라별로 작품이 편집되어 있긴 하지만, 각각 독립된 단사진의 모임일 뿐 내용상 하나로 연관되는 씨리즈가 아니다. 즉 유럽의 여러 곳을 찾아간 까르띠에 브레송이 단사진의 한정된 화면에 알맞는 풍속이나 미묘한 생활감정 등을 훌륭한 표현기술을 구사하여 한 장씩의 걸작 사진으로 만들어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씨리즈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강력하고도 일관된 테마의 전개가 없고, 독자는 다만 그의 명작 솜씨에 매료되어 거기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런 점에서 까르띠에 브레송의 작품은 단사진의 형식으로는 최고의 표현인 동시에, 아울러 그 형식이 갖는 표현의 한계와 결점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단사진이라는, 아카데믹한 회화주의로 치우치기 쉬운 형식은 오늘날 대단히 문제성이 많은 표현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진가의 표현의식이 씨리즈나 조사진의 형식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을 수긍하게 된다. 그런데 사진가들 사이에, 특히 따블로 주의에 빠지기 쉬운 단사진의 형식에 의문을 품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단으로 사진을 여러장으로 엮으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이에 앞서 1929년에 독일의 '데어 아르바이터 포토그라프'지에 발터 네터베크의 '레포르타겐'이라는 글이 실려, 시리즈의 필요성이 제창되었다. 즉 네터베크는 '단사진이란 일부분을 나타내는데 그치고, 따라서 그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결함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입장을 정확하게 밝히고 테마의 내용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진은 씨리즈의 형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시대에 앞서 사진의 성격을 갈파한 탁견인데, 이 무렵부터 씨리즈나 조사진이라고 하는, 복수에 의한 형식을 구사하여 사진가는 표현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씨리즈나 조사진의 창조적인 기능성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충분히 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사진들을 엮는다는 것은 표현에 스토리성을 부여하여 시각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편집상의 테크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하여 모처럼 단사진의 표현에서 벗어나고도 엮는 방법이 고작 픽쳐 스토리라는 방향으로만 치달아 마침내는 스토리를 지상의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마저 생겼다. 그 때문에 개개의 사진표현은 쇠퇴하여 설명적인 데로 떨어지고, 멋대로 현상의 시간적 공간적인 진행상황을 스토리로 전개하는 카탈로그식의 표현으로 뻗어 나아갔다.

 그런데 사진을 엮는 일의 창조적의 미는 영상을 전체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몽타주의 미학이기도 한데, 요는 엮음으로써 시간적인 연속성이나 공간적인 상황의 순서를 쫓는 것보다 영상 그 자체에 감각적, 직관적인 시각능력을 존중하면서 한데 엮이는 영상들이 상호작용으로 일으키는 심리적인 충격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엮는 데 있어 스토리성을 전적으로 거부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사진들을 엮으면 스토리가 자연히 따르기 마련이라는 안이한 스토리 주의를 뛰어넘어 영상표현과 토탈이미지를 중요시해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테마나 제재에 따른 영상효과를 끌어내려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와 같은 사진을 엮는다는 창조적 기능에 대해서 많은 사진가가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즉 과거처럼 사진을 엮는다는 것을 사진으로 글을 짓는 기술처럼 생각하여 스토리에 크게 의존하는 잘못된 태도가 차츰 청산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단사진의 전성시대와는 달리, 사진이 엮어짐으로써 이미지가 강렬하게 뒤얽히면서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뛰어난 씨리즈 사진을 숱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잠깐 언급한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이 그 한가지 에일 것이다. 이것은 스위스 사람으로 미국의 사진계에서 유명해진 그의 포토 엣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집인데, 미국에 대해서 쓴 문화인들의 말을 가지런히 옆 페이지에 함께 실어 편집한, 약간은 보통 사진집과 다르게 꾸며진 것으로, 결코 까르띠에 브레송과 같은 단사진의 걸작집이 아니다. 역시 제재에 있어서나 일상적인 생활과 풍속을 대상으로 한 점에 있어선느 별반 다른 것이 없으나, 브레송처럼 단사진의 형식을 가지고 풍속적 리얼리즘의 걸출한 표현을 하려는 태도는 로버트 프랭크의 표현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속셈은 전체의 사진을 엮어감으로써 인간이 소외되어가는 미국의 물질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시리즈의 방법을 택함으로써 그는 미국인의 일상성 속에 파고 들어가, 미국 사람 자신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문제점을 매우 지적인 냉정성을 가지고 비판을 가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주는 표현으로 이끌어갔다. 아마도 단사진의 형식을 쫓았더라면 이와 같은 날카로운 비판이나 작가의 예민한 응시를 올바르게 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집 '뉴욕'에도 역시 해당되는 말이다. 이 사진집의 사진을 한 장씩 떼어서 각각을 단사진으로 보면, 화면의 입자가 거칠고 구도가 불안정하고 떨림이 유난히 심하여 매우 기묘한 스타일이라는 흥미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담하게 여러가지 비정상적인 기법을 알맞게 동원해서 작가의 의도대로 씨리즈로 엮었을 때, 일반 상식을 넘어선 수법은 오히려 뉴욕의 문명과 생활을 통렬하게 공격하고 인간상실의 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영상만이 갖는 직시성과 영상의 결합에서 생기는 충격 효과의 심리적인 명암을 극히 감동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사진을 한 데 엮음으로써 토탈이미지에서 발생하는 효과가 작가의 주관을 더욱더 강렬하게 표현해준 셈이다.

 이와 같이 씨리즈나 조사진의 형식은 사진의 현대적인 표현수단이며, 그 기능의 창조적 개발은 아직도 개척되지 않은 미지수의 에너지로 묻혀져 있다. 이런 점에서 단사진은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표현의 성격이 걸작주의에 기울기 쉽고 따블로 의식에 사로잡히기 쉬운 형식이란 숙명을 안고 있다. 

또한 그렇지 않을 경우라도 이른바 다이제스트적인 표현에 쏠리기가 십상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톤의 베리에이션


모든 사진은 명과 암 그리고 중간의 톤 밸류를 합친 톤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섀도우부터 하이라이트까지의 농담의 계조의 의해 표현이 이루어진다. 이것으로 현실을 해석하기도하고 자기의 이미지를 결정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사진표현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독자적인 수단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진가 웨스턴은 '계조는사진적 표현의 상표와 같은 것이다. 사진인 이상은 게조를 접어두고 생각할 수 없다. 계조는 사진을 소묘나 회화와 구별짓는 특성이다. 그러나 계조가 풍부할수록 그만큼 좋은 사진이라고 잘라말할 수는 없다. 나는 미묘한 게조의 변화가 많은 사진인데 조금도 재미가 없는 사진을 숱하게 보았으며, 이와 반대로 전체 화면에서 계조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 않았는데 훌륭한 사진작품을 많이 보아왔다. 계조는 요컨대 기교와 마찬가지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대상을 어떠한 흑과 백의 관계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창조를 위한 한 수단이며, 톤의 처리를 하는 방법에 따라서 사진의 독자적인 좋은 표현이 기대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백에서 흑까지의 농담계조를 고르게 살리는 것이 톤의 정상적인 처리라 생각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맞는 생각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톤의 처리가 실제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나 앞서 웨스턴이 지적한 대로 톤의 정상이 곧바로 좋은 사진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고 정상을 깨뜨린 경우에도 좋은 사진이 나올 수가 있다. 특히 예술성이나 개성을 앞세우는 표현에서는 톤의 베리에이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즉 흑과 백의 농담을 폭넓게 잡지 않고 매우 좁은 스케일로 처리함으로써 평범한 사실을 표현상 눈에 충격을 주는 효과로 상승시킬 수 있다. 의도적으로 화면의 입자를 거칠게 하고, 정상적인 톤을 대담하게 깨뜨림으로써 대단히 흥미있는 결과가 얻어진다. 

 일반이 기피하는 사진의 부정적인 결점까지도 끌어들여 톤의 베리에이션을 다각도로 연구함으로써 독특한 마티엘의 감각적 효과를 낼 수가 있으며, 이것이 주제와의 통일을 기하도록 사용되었을 때 놀라운 시각효과가 나타나 표현의 격조를 높여 준다. 이런 점에서 톤의 처리를 할 때에는 그 목적에 알맞게 언제나 의욕적인 연구가 바람직하다. 작화할 때 모든 계조를 다 내려고 하는것만이 톤의 이상적인 취급법은 아니다. 톤이란 작품의 주제에 따라서 늘 개성적으로 처리하는 데서 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톤의 베리에이션도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창조적인 기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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